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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지역화 시대의 여성과 여행, 관광 상품과 관광 작품에 대하여

조한 혜정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교수, 문화 인류학)

 

1. 남성, 여성, 그리고 여행

‘근대’는 집/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찾아든 사람들, 그들의 길고 짧은 여행이 새 시대를 만들어나갔다. 근대의 젊은이들이 탐독했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나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등은 바로 그런 ‘근대의 주인공’들이 떠난 긴 여행의 이야기였고,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많은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형성시킨 사람들이 근대의 주역이 되었다.

  근대 초기, 집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에 여자들은 없었다. 대학 공부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군인이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고 또 여행의 의미를 터득한 인구는 남자들이었고, 기차와 배와 버스는 남자들로 붐볐다. 여자가 있었다면 남자와 동행하는 예외적인 소수가 동승했을 뿐이었다.

  ‘근대’가 무르익어 가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들, 그것도 남자와 동행하지 않은 여자들이 여행의 행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고, 고등 교육을 받으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이 일었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눈부신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후기 근대를 논하는 지금,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욱 열렬하게 여행을 떠나고 있다. 물론 여행의 개념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 시대에 여행은 여가의 상징이었다. 여유 있는 소수가 향유할 수 있는, 그리고 열심히 일한 댓가로 받은 ‘보상’이었다. 일과 놀이가 확연하게 구분되었고, 그 이분법에서 ‘일쪽’이 단연 우세하였다. ‘일하기 위해 노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개인에게나 사회 전체적으로 더 이상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것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후기 근대’에 들어서면 양상은 크게 바뀐다. 고도로 세련된 관리 사회의 성원이 된 사람들은 일터에서 마모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끊임없이 탈출을 기도하게 된다.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여행은 이제 삶의 생기를 얻기 위한, 삶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적 품목이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태도를 형성하는 학습의 장이 된다. 근대에 길들여진 ‘일 중독적 몸’을 바꾸어내고 스스로 생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래서 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거대한 인구 이동이 시작된다. ‘호텔’이라는 서구의 초근대적 공간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며 자신도 근대의 행렬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뿌듯해하는 획일적인 여행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삶의 생기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나는 행렬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소녀 시절에 몰입해서 읽었던 [폭풍의 언덕]의 작가 샤롯 브론테가 살았던 목사관, 버지니아 울프가 2차 전쟁이 터지자 비통한 글을 쓰면서 삶을 마감한 마을, 지역문화를 새롭게 살리기 위해 지역의 여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들어낸 여성 박물관을 방문하며 그곳 주민이 만들어낸 삶의 에너지를 느껴보는, 그런 여행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여성 여행의 시대는 그전과 어떻게 다를까? 그간 남성의 관점이 지배해온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 ‘기생 관광’이었다면, 여성 여행의 시대가 열리면서 대표적 관광상품은 어떤 것일까?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주요 관광 상품이 기생관광, 매춘 관광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밤에는 기생 파티’ “한국에서의 나이트 라이프는 삼청각에서”라는 문구들이 여행사들이 준비한 팜플렛에서 발견되는 문구들이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쇼핑과 디스카운트한 일류호텔과 전통적 명소를 찾는 여성 여행객들이 붐볐다면, 요즘에는 김치 담그기 여행부터 한류 열풍의 주인공을 만나러,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참석하러, 한국의 산수를 접하러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관광의 주체가 다양해지고 있고 특히 여성들의 소비력이 높아지고, 수명도 연장됨에 따라 여성들의 여행은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스무 살에 편도 비행기표 한 장만 들고 떠나는 여자들의 삶을 그려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는데, 이 같이 국경을 넘나드는 욕구를 가진 여성들의 행렬은 21세기에 더욱 길어질 것이며, 특히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가진 아시아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욱 부지런히 국경을 넘어 여행할 것이다. 이들은 여자들끼리만 가도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지를 찾고 있다. 새로운 지역 관광의 주요 향유자는 다양한 나이층의 여성들이며, 여성들은 친구끼리, 모녀끼리 혹은 여행지에서의 의미 있는 만남에 목적을 두고 획일적인 패키지 아니라 작은 규모로, 또는 개인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들을 위해 여성과 관심과 관점에서 여성문화와 여성사 관련 여행 코스를 개발하고 특히 역사속의 여성인물들이 살아간 숨결을 느낄 수 있다거나 현지의 존경스런 여성 문화예술가들과 만나고 여성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는 여행 코스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2. ‘졸속 상품’이 아니라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책

 

 

제대로 된 여행 ‘상품’을 만들려면 먼저 ‘작품’이 나와야 한다. 여행 수요자들의 욕망과 관점이 중심에 있는 작품들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적이고 경제중심적 근대화를 거쳐, 고도 압축적 변화의 과정을 겪어낸 사회의 경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생략되어왔다. 단순한 모방과 복제에 급급해야 했고, 그래서 하청의 영역만 기형적으로 넓은, “하드 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는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었다. 한국사회도 문화와 경제 간의 불균형 이 심한 사회로서, 문화영역은 극히 빈곤하고 소프트 웨어 부분 역시 턱없이 빈약한 사회에 속한다. 여행 상품의 수준 역시 획일적이고 단편적이다. 아름다운 만남이 가능한 삶의 시공간, 함께 체험해볼 문화예술교육 콘텐츠를 찾아보기 힘들다. 섣불리 돈만 벌 생각으로 조야한 상품을 계속 만들어낸다면 장기적 전망으로 가야하는 관광산업의 미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정부의 관광정책은 당장 ‘상품’을 만들어내라고 보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는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지금까지 대중들이 해온 관광 여행이 비행기를 타고 세계적 명소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호텔과 비싼 레스토랑을 전전하는 패키지 여행이었다면 삶의 생기를 찾아 나서는 후기 근대적 맥락에서의 여행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각기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진 이들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획일적인 상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서로 만나서 시너지가 날 맞춤형의 여행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가서, 누구와 만나 어떤 감동을 느낄 것인가를 중요해지고, 다양한 창조적 문화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순례를 떠나는 곳은 이미 몇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시인의 무덤일 수 있고, 자신이 몰입해서 보았던 텔레비전 드라마와 촬영 장소일 수도 있다. 단순히 보는 관광에서 만남과 체험을 통해 감동을 얻고 싶어 하는 시대가 온 것이고, 획일적인 여행 상품이 아니라 선택이 가능한 다양한 상품들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다양성은 ‘여행 전문가’가 아니라 즐거운 여행을 하다보니 전문가가 된 여행 매니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순한 소비자와 여행 전문가가 아니라 여행 계획을 스스로 짜는 여행자들의 행보가 중요해진다. 바로 그들이 질적인 여행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생비자(소비하면서 동시에 생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많이 하다보니까 저절로 여행사사장이 되는 것.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여행 작품을 만들어내었더니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더라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갈구하는 여성이 둘러본 전쟁의 흔적이 남은 지역 여행이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되고, 여성으로서 긴 자아여행을 떠난 이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한 여성의 했던 여행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원하는 많은 여성들을 위한 관광상품이 되는 것이다.

 

 

3. 글로벌/지역화 시대의 주체적 시민과 관광의 지형

 

 

여행의 판도도 바뀌고 있다. 도시를 찾는 여행객들은 이제 그 도시들이 판박이처럼 똑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아직 삶의 숨결이 남아 있는, 좀은 천천히 가는 속도를 느낄 수 있는 시골이나 작은 마을들을 찾아가고 있다. 아시아 지역내의 관광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서구로의 여행을 떠나는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도 세계의 안보와 질병 문제가 불거지면서 원거리 관광보다 중.단거리 관광객이 들어나고 있다. 지금 아시아를 찾는 아시아 여행객들을 보면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초고속 경제 발전을 하고 있는 중국 등지에서 국경을 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근대적’ 대중 관광객들이고 다른 하나는 맞춤형 관광을 하려는 사람들이다. 대중문화의 유통과 함께 아시아 지역내의 만남의 의미가 높아지고 있고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가려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이런 관광객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이때 여행객의 다수는 여성들이다. 이들의 여행이 기존 여행과 다른 것은 ‘문화적’인 여행을 욕망한다는 것이고, 또한 새롭게 ‘아시아’를 발견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이런 여성들의 여행은 바로 새로운 지역화와 글로벌 시대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은 새롭게 삶을 의미화하면서 궁극적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 전지구적 세계시민사회의 평화로운 기틀을 마련할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인류사를 통해 활발한 시장 교환과 인적 교류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기본 장치였다. 전쟁과 갈등으로 인류가 멸종을 할지 모른다는 시대에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여행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는 에너지원이자 협력의 시대를 열어갈 경험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아이들을 데리고 전쟁의 역사를 살피는 평화 관광 코스를 개발하여 작으나 대대적인 평화운동을 벌여가는 여행모임과 여행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카프라의 말이 구체화되는 새로운 시대가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행의 시대를 통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그간의 여행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지역을 찾아나서는 관광객들이 많아졌고,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과 지역의 풍물에 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역 관광산업의 수준은 매우 척박하다. 지역의 고유한 삶과 역사가 섣부른 관광화로 인해 오히려 파괴되고 박제화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역중심의 관광은 그 지역의 문화와 경제를 삶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을 살려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여행상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지역적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여행객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구는 경험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후된 학교를 버리고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가는 경험을 한 지역주민들이 있다면 그런 것을 하고 싶은 이들이 이 지역을 찾을 것이고 서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진솔한 만남이 가능한 여행, 지역의 이야기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 그대로가 [문화해설자]의 이야기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향기가 급격하게 고갈되는 사회에서 여행자들이 찾는 것은 바로 삶의 향기와 에너지이다. 삶 자체를 느껴보고 새 시공간을 경험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다시 회복하는 것, 모두가 공유하는 일상적 삶의 고단함과 즐거움이 살아 생동하는 삶에 타인을 초대하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관광의 핵심이 될 것이다. 지역의 역사적 유적지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각각의 여행객에게 따라 다른 버전으로 들려질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역시 그만큼 다양한 문화해설자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면에서 나는 현재 문광부가 추진하는 문화해설자 제도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남성중심적이고 단일한 텍스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지방의 일상적 삶을 일구어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해설자가 되는, 그래서 독서지도를 하는 주부들이나 시민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나누는 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지역적인 여행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행이 지금 시대에 필요한 여행이다.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지역 혹은 세계의 삶을 일상에서 연결해내는 경험, 수준 높은 시민사회적 의식과 탈주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 후기 근대적 여행의 작품들이 많이 나와야 할 때이다.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는 고도관리시대를 사는 후기 근대인들이 원하는 여행은 바로 그런 여행이고, 그런 여행이 인류의 전지구적, 국가적, 지역적 삶을 다시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내 줄 것이다. (200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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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0 16:0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2004년 작업장학교의 '국경을 넘고싶다' 프로젝트때 읽었던 조한의 글. 우리도 제대로 관광작품화를 해야하지 않을까?
  2. 로이
    2008/06/20 20: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여행이 무엇인지 한번 얘기를 나눠보는 자리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