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미리 답사를 와야 했던 곳이지만 답사를 오지 않아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찍을 것인지 모르는 상태로 갔던 나는 답사를 오지 않아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 즐거움이란 처음 봐서 신기하고, 뭔가 있어 보이고?, 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인데 이 즐거움을 느낀 대신 답사를 오지 않아서 라기 보다는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했던 한번 본 것을 다시 유의 깊게 관찰, 새로운 생각 같은 것을 왜 안했는지 끝나고서야 생각이나 의문을 가졌다. 다시 한 번 가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을까? 같은 것 말이다.
테헤란로에 갔을 때는 주로 직장인들과 미용실 그리고 밥집이 많이 보였다.
시간이 11시 30분이 됐을 무렵 많은 직장인들이 여러 건물에서 나와 밥집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아직 12시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나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런가 생각하고 있을 무렵 미오가 12시가 넘어서 나오면 밥 먹을 자리가 없어진다. 라는 소리를 하셔서 그제야 이해했다.
우리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난 미용실을 보면서 밤에 저기에 수많은 여자분 들이 들어가서 머리를 손질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들었고, 회사 건물 밑에 당당하게 미용실이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외에 상당한 미용실들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련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강남을 갔을 때는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강남에는 스타슈퍼 라는 슈퍼가 있는데 그 슈퍼에는 다른 나라의 식료품 같은 것도 상당 수 팔고 있고, 가격도 다른 마트 같은 곳의 비해서 비싼 편이었던 대다가 많은 외국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스타슈퍼를 한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강남에서 제일 높은 빌딩 3가지를 봤는데 높은 건물에 유리로 된 듯한 벽을 보면 왠지 쓸데없이 돈을 쓴 거 같기도 한 느낌이 있었고, 버스가 없다는 것을 듣고서 나는 이러면 돈 낭비가 심할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강남을 구경하고, 이제 포이동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포이동은 판자촌이었는데 그 곳에 가자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허름하다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벽에다 그려 논 그림과 강남에 비해 훨씬 낮은 건물들과 거리가 좀 떨어져있음에도 너무나 잘 보이는 강남의 빌딩들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지역의 차이는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심했고, 심지어 포이동 사람들은 빌딩을 보면서 항상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을 말소 당한 것 마저 서러운데 건너편에는 높은 빌딩들이 당당하게 서 있으니..
이런 생가들을 해서인지 여기서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양쪽을 바라보기 보다는 포이동 사람들의 편에 서서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란시장에 도착하자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은 개, 닭, 염소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아저씨 와 아줌마 모란시장에서는 개, 닭, 염소, 고양이, 오골계?, 오리 같은 동물들이 건강식품(?)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처음엔 귀엽고, 신기해서 구경을 하였지만 길을 가면 갈수록 보이는 개고기에서 개의 귀가 남아있는 모습 개 배 가운데에 칼이 꽂혀있는 모습 같은 것을 보면서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모란시장을 따라가도 다른 가게(과일가게 같은?)는 보이지 않고, 똑같은 가게들만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가봤자 똑같은 것 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모란시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애완동물을 파는 가게, 애완용품가게, 마지막으로 강아지 경매장... 바로 밑 또는 건너편or옆 에서는 죽여서 고기로 팔고, 있는데 그런 곳에서 애완동물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극과 극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나이 들어 혼자 사는 걸 두고 ‘외로우실 텐데’, ‘쓸쓸하실 텐데’ 얘기하는 건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요즘은 혼자 사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으니 그런 얘기는 쓸데없는 참견이 되고 만다.
이제는 혼자 사는 노후를 지탱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일본에서 10개월 만에 75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오히토리사마노 로고>(싱글의 노후)의 지은이 우에노 지즈코(60·사진) 도쿄대 대학원 교수를 16일 서울에서 만났다.
가족없이 홀로 사는 사람들의 노후가 결코 무섭지도, 불행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행복할 수도 있다며, 여생을
의미있게 보내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방법에 관한 사색을 담담하게 펼친 그의 책이 최근 <화려한 싱글, 돌아온 싱글,
언젠간 싱글>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사회학과 여성학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인 그는 ‘싱글’ 문제를 사회적
화두로 만든 공로자로 꼽힌다.
그는 죽을 때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전통관념도 깨야 한다고 말했다. “죽는다는 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사람은 결국 혼자 죽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다거나,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고민하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 쪽의
집착일 것이다. 혼자 살다 보면 혼자 죽을 수도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국 2년 반, 독일 1년, 멕시코에서 반년 간 생활했다는 그에게 서양체험이 그런 가치관이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끼쳤느냐고
묻자 “그건 아니다”며 “여성학적 관점에서, 많은 여성 독신 선배들이 가족 도움 없이 친구들끼리 서로 도우며 노후를 보내는
사례들을 취재하다 배우고 깨친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나이들면 자식과 손자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는 관념이 오랜 세월을 지배했으나 이젠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다. 65살 이상에서 자식과 함께 사는 비율은 1980년 약 70%에서 2006년 44%로 줄었다. 홀로 사는 세대만
16%다. 특히 65살 여성의 55%는 배우자 없이 홀로 살고, 80살 이상 여성은 무려 83%가 싱글이다.”
우에노 교수 자신도 싱글이다. “남자가 싫은 건 아니지만
마누라가 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지금 30대 전반 일본 여성의 약 25%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수도권 여성은 그 비율이
30%에 이른다. 2005년 현재 일본인 평균수명은 남성이 78.5살, 여성은 85.5살. 85살 이상의 남녀 비율은 5 대
2. 따라서 21세기 일본이 ‘할머니들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당연해 뵌다.
그는 “당사자 주권”을 강조하는 자신의 싱글 예찬(?)이 가능해진 건 2000년부터 시작된 전국민보험(國民皆保險, 개호보험)
덕이 크다며 지난 8년간 그 문제를 꾸준히 천착해왔다고 말했다.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6권짜리 공저 <케어, 그 사상과
실천> 등도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건강보험에 이어 개호보험이 시행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미국에선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그는 “미국 방식은 최악의 길이니 한국은 절대 미국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거듭 얘기했다.
15일 서울에서 열린 ‘신자유주의와 성(젠더) 평등’ 주제의 한국여성학회 회의에서 그가 강조한 것도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따라가선 안 된다는 것, 시장의 한계를 해결하는 길은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유럽식 사회민주주적 재분배 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마에서 한국으로 오신지 십년이 되어 가시는 부다씨 와 얘기를 통해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에서 삶을 짧은 시간 이지만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의 이주민들은 100만 명 중 50만이 국제결혼 등을 통해 오신 여성분들이고 나머지 50만은 모두 이주노동자 이다. 그 50만의 이주노동자 중 20만이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못하다. 심지어는 이주노동자들을 범죄 집단 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정보다. 법무부의 통계에 따르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중 동남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선진국 국적의 외국인보다 범죄자 수가 훨씬 적다고 한다. 이들은 오히려 임금체불과 의료사고를 비롯한 기타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고용허가 기간인 3년이 지나고 1달이라는 자진출국 시간을 준 뒤에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체류자로 간주하고 불시에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있다. 이를 두려워한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결국 사장이 폭력을 일삼든지 임금을 적게 주어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 최근에는 시민단체와 각 나라별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이런 불합리한 행위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 그러나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체포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들
이들의 한국 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공장사장들의 태도나 갑작스러운 단속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 사람들의 편견이다. 우리는 유난히 피부색에 민감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도 여행을 온 흑인이나 동남아에서 온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말을 걸거나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 하거나 꺼려한다. 그러나 백인이 말을 걸어오면 그 태도는 정반대다. 이는 정말 웃기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잘 구분하지도 못한다. 동남아인들 중에도 그 생김새가 조금 한국인 같고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잘 구분하지 못 한다. 프로젝트 중 봤었던 ‘말해요 챤드라‘에서처럼 네팔사람을 단순히 말이 어설픈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 오해하기도 할 것이다. 백인들은 모두 잘사는 선진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존중하고 동남아나 서남아 에 서 온 사람들을 우리 보다 못산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이런 행태들은 점점 다양한 문화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로이: 상계동.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함. 그 다음에 중학교 3학년 (지금) 연립주택으로 이사.
아파트는 고립된 느낌이었다. 주택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주택은 다른 사람과 많이 알 수 있었지만 아파트에서는 통장님이 돈 받아 가는 것만 있었다. 교류가 없다. 다시 주택으로 갔다. 밑에 집에 이모가 사셔서 잘 지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시대의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
산: 잠깐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세나 월세로 사니까 곧 이주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곳에 터를 잡는 게 아닌 것이다.
로이: 다음번에는 서로 얼굴을 알고 음식도 나눠먹는. 이웃 간에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
산골마을 같다.
? 본인이 이웃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게 아닌지?
렌죠: 출생지는 잘 모르고 어렸을 때 안양 중앙시장 부근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이사를 갔다. 왜냐면 월세가 다 되어서 나갔음. 처음으로 이사 간 것은 주택이었다.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었다. 중앙시장에서 오래 살아서 정이 들어서 다른 곳으로 가기 싫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감. 나는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는데 주변에 모든 시설이 있어서 편리하고 학교랑 가까웠다. 아파트에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아파트에 살기 전 주변 근처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고물상이 있었음.
이웃과 가깝게 지냈을 때는 중앙시장근처에서 살았을 때 밖에 없는 것 같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았다. 다음번에도 중앙시장 근처에서 살고 싶다. 아는 사람이 많고, 어렸을 때 추억이 있고, 시끌벅적하고, 공기가 좋은.
산: 대전에서 태어났지만 군산에서 살았다. 부모님께서 운동하실 때라서 숨어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5살부터 계속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대전에서 할머니의 병간호를 하기위해 3달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금산간디. 해방학기 제천 푸른누리. 시골에 전기와 전화만 들어오는 곳에서 농사지으면서 한달 살았다. 간디학교 돌아와서 산청에 흙집짓는 사람에게 가서 2달 정도 있었음.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경기도 광주에서 하자 다니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영등포 시장으로 이사 옴.
교육과 배움으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이주를 함. 앞으로는 내가 배울 것이 가깝고, 많은 도시에서 살고 싶다.
반야: 전남여수에서 태어났고 살기는 어려서부터 경기도 부천에서 원종동에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천 중동 신도시에서 살았다. 백화점 많고 건물 많고 아파트가 많았던 도시였다. 원종동에서는 대부분의 아파트가 5층이고 아파트도 거의 5층짜리 빌라처럼 보였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친해서 이사를 하기 싫었다. 중동 신도시에서는 편의시설도 가까웠고 학교도 가까웠다. 교육 때문에 중동으로 이사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수로 가게 되었다. 집안사정으로 여수로 갔다. 어머님의 고향이기 때문에 간 이유도 있다.
6개월 정도 여수에 살다 남원으로 가게 되었다. 지리산에서 중학교시절을 보내고 지금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골에 가서 살 것 같다. 친자연적으로 살고 싶어서, 추억과 뿌리가 담겨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아마 함평?
10대들 중 왜 이사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간 사람들도 많다. ; 이주, 이사의 이유
도시가 커지면서 집을 넓혀가는 것 그런 것을 따라 다니는 것. 부모님의 직장, 교육문제 이유 없는 이주, 이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꼬미: 이사는 3,4번 했다. 성남에서 태어났지만 성남에 대한 기억은 없고, 가족이 시골에 살고 싶다고 하여 옥천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강릉으로 이사. 6학년 때까지 강릉 교동에서 살았다. 강릉으로 이사 간 것은 가족이 이사를 해서 가게 되었다. 조금 더 좋은 도시로 이사 간다는 것만 좋았다. 강릉에서 중학교를 시골로 갔다. 서울에서 강남으로 가게 된 이유는 동생 공부와 직업 때문에. 어머님 직업이 옮겨졌음.
서울을 문화시설 같은 게 많아서 동경했었는데 살다보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중학교가 있었던 완주에서 살고 싶다.
-좀 더 살을 붙여야 함.
기획의도: 도시 안에서 여러 이유로 많은 이주나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사, 이주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맵핑을 통해 현대 사회에 많은 이주나 이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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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이주노동자공동체연합, 민노총 조합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고용허가제 4년 규탄! 야만적 단속추방
중단과 이주노동자 노동권 보장 촉구 결의대회'를 열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 중단과 합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마석가구공단·청산농장 대상 110명 붙잡아 “미등록자 3만명 줄이겠다” 법무부 ‘본보기’
정부가 올해 안에 미등록 이주노동자 2만명을 줄이겠다며 12일 경찰 병력까지 동원해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이에 “인권을 침해하는 강제 단속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싹쓸이하려 한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법무부와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 등의 말을 종합하면, 법무부는 이날 출입국사무소 직원과 경찰 280여명을 동원해 마석가구공단과
경기 연천군 청산공장 등 경기도 일원에서 이주노동자 130여명을 붙잡는 등 전국적인 단속을 펼쳤다. 이주노동자 단속에
법무부·경찰 합동 작전까지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법무부는 밝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몰려 있는 마석가구공단에서 오전 10시께부터 2시간 가량 진행된 단속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이주노동자 단체들은 전했다. 경찰 버스가 공단 진입로를 막고 경찰이 공단 안 골목마다 지키는 가운데, 검은 제복 차림의
단속반원들이 10여명씩 모둠을 지어 공장과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공장 기숙사에 있던 방글라데시인 오닉(32·가명)은 “여기저기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사람을 끌어내는 소리가 들렸다”며 “잠긴 문에 소파를 덧대어 간신히 피했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샬롬의 집’ 조은우 활동가는 “퇴로를 막고 눈에 띄는 외국인은 무조건 잡아갔으며, 단속반원이 신분을
밝히거나 이주노동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카메룬인 노동자가 단속을 피해 담을 넘다 발목이 부러지는
등 단속 과정에서 5명이 다쳤다고 이주노동자 단체는 전했다.
법무부는 “불법 체류 외국인 밀집지역이 슬럼화되고 외국인 범죄의 온상이 되는 등 치안 부재 현상이 심화돼 대규모 집중 단속을
벌였다”며 “경찰 병력은 단속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다”고 밝혔다. 법무부와 노동부는 지난 9월
대통령 주재 국가경쟁력강화회의에서 “5년 안에 불법 체류 외국인을 국내 체류 외국인의 10% 이내(현재 19.3%)로 줄이고,
현재 22만명인 불법 체류 외국인을 올해 안에 20만명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사업장이나 거주지에 들이닥쳐 불심 검문을 하는 ‘토끼몰이식’ 단속은 이를 피하려는 이주노동자의 부상과 죽음 등으로
이어지며 ‘인권침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5년 “이주노동자 단속·보호·구금 때, 형사사법 절차에
준하는 절차 제도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외국인 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이날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압적인 대규모 단속으로 싹쓸이하는 방법으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살인적인 강제 단속 추방 정책을 즉각 중단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최원형 김지은 기자 circle@hani.co.kr
나는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촬영해 놓은 영상과 몇 가지 사진들을 통해 광주민주화 항쟁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박진 영 씨의 사진들을 통해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의 모습들을 좀 더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한참 치열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군인들 사이를 뚫고 학교에서 귀가하는 아이 의 모습 담배를 피우는 시위대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이 나의 마음을 더 뭉클하게 만들었다. 내가 본 영상과 사진에는 광주 민주화 항쟁당시의 시위대의 전체에만 초점이 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에서 나는 이렇게 집단으로써 눈에 보이는 치열하고 참혹한 광경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의 표정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프랑스인 남자가 초록색 페인트통을 들고 이스라엘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이 남자에게 알아듣지 못 할 말로 욕을 하기도 하고 페인트를 지우기도 하며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한다. 이 남자가 그리고 다니는 선은 일반적인 페인트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페인트로 땅에 줄이 그어졌을 때에는 사람들이 반대방향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는 경우도 보였다. 쉽게 넘을 수 있는 선을 그들은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낯선 이가 그어놓은 금 하나도 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다른 무언가새로운 것을 접할 때 생기는 두려움을 표현한 것 같았다. 또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사이에 있는 벽 같기도 했고.
대운시장
이 전시는 ‘복덕방’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광주의 한 재래시장에서 열렸다. 재래시장에서 열린 이 전시는 시장에 너무나 잘 융화되었기 때문에 전시들이 시장의 일부분이라고 느껴졌을 정도였다. 또한 재래시장이라는 장소가 전시관에서 긴장하며 작품들을 보았던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작품들을 볼 때 가끔 이런 질문들이 생긴다. 이게 왜 예술이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등의 의문들 말이다. 나는 이 의문들 때문에 답답하다는 이유로 작품을 통해 작가의 의도나 생각들을 읽는 것을 힘들어한다. 읽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인가? 광주 비엔날레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들을 다시 보니 작가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작품에 들어가 있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것 위주였다. 이 작품들 말고 무언가 추상적이고 머리를 써야 되는 작품들은 나에게 그렇게 큰 무언가를 주지 못했다. 물론 작품을 만든 작가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려는 나 자신도 문제가 있으니깐.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현대의 예술 작품들이 시대를 읽고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딱히 예술이라는 분야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도 작품을 통해 함께 의사소통 할 수 있도록 해 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청계천이라는 공공장소에 있는 소라모형처럼 서울시와 작가만 즐거운 작품 말고 말이다.